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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눈
‘악한 눈’에 대한 사상은 고대 근동 지방들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모슬림 국가들과 그리스 또 이스라엘 사람들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생각입니다. 악한 눈은 단순한 눈이기 보다는 악한 능력을 가진 실재입니다. 이 악한 눈은 어떤 악한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를 해롭게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옛날 슬라브족 민담에는 한 아버지가 자신이 악한 눈을 가졌다고 생각에 시달리다가 자녀를 해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눈을 빼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악한 눈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서 눈 주변을 검게 칠한다든지,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는다거나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기도 하고, 또 입을 벌릴 때 악한 눈이 강하게 역사한다고 믿어서 식사를 하거나 마실 때 이런 악한 눈을 무서워 한 나머지 식사를 할 때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합니다.
성지 순례 차 이집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첫 날 카이로로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간혹 집 담벼락에 검은 색으로 메카의 성지가 그려져 있고, 그 좌우편에 사람의 얼굴과 이름 등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김동문 선교사님이라고 요르단 선교사님이시면서 성지 순례를 도와 주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그 집 주인이 성지 순례를 다녀온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집 사람들을 ‘악한 눈’으로부터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하여 그려 놓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고대 근동에서 악한 눈 신앙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드라쉬를 보면 그들도 이런 ‘악한 눈’ 신앙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미드라쉬는 ‘율법 주석’입니다. 민수기 22:1-5절의 미드라쉬를 보면 이 ‘악한 눈’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이 민수기의 구절은 브올의 아들을 발람이 모압 왕이었던 발락의 청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평지로 오는 장면입니다. 민수기 22:5의 말씀은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인데, 그 구절에 따르면 “발락은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오려고 사신들을 브돌로 보내어 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발람은 큰 강 가, 자기 백성의 자손들이 사는 땅 브돌에 있었다. 발락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한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드디어 바로 나의 맞은편에까지 와서 자리잡았습니다”. 여기에서 ‘온 땅을 덮고 있다’는 구절은 원래 ‘온 땅의 눈을 덮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발람과 그의 가르침은 세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곧, ‘악한 눈’, ‘오만한 정신’ 그리고 탐욕스러운 영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가 악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까? 왜냐하면 민수기 24:2에 ‘그가 그의 눈을 들어 이스라엘 민족들이 거주하는 곳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Midrash Rabbah Bamidbar 20:10). 물론 이런 미드라쉬의 주석은 옳다고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악한 눈’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지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예언서에서 ‘정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מִשְׁפָּ֑ט와 צֶדֶק / צְדָקָ֖ה가 대표적으로 사용 되었다. מִשְׁפָּ֑ט는 שָׁפַט로 부터 파생된 명사인데 그 기본 의미는 메시아나, 왕, 재판관, 종교 지도자, 관료,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회중이 ‘통치의 과정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고대 정부의 통치권은 오늘날처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함께 기능하는 것이다. מִשְׁפָּ֑ט이란 말도 이런 통합적인 성격이 있었다. 곧, מִשְׁפָּ֑ט는 שֹׁפֵט(재판관)이 내린 판결이라는 뜻이 있고 이런 법적 판결들을 실행하는 통치권 (행정부)의 의미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실 때 어떻게 그 통치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법권과 행정권을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행사하실 것인가? 특별히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갇힌 자, 흑암에 있는 자,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통치권을 어떻게 행사하실 것인가?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이루어 내는 하나님의 방법과 태도이다. 그러므로,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도덕적 윤리적 성격이 아니며, 하나님은 또한, 그의 백성을 통치하심에 있어서 그 실행을 왕이나 정치 및 종교 지도자, 심지어는 성읍의 거민에게 위임하시며(출애굽기 18:13, 15) 그 통치를 실행함에 있어 그들에게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요구하신다. מִשְׁפָּ֑ט가 통치 행위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צֶדֶק나 צְדָקָה는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일치시키는 순종 행위였다.
아모스에게는 מִשְׁפָּ֑ט와 צֶדֶק / צְדָקָ֖ה의 이런 고전적인 어원의 의미가 잘 살아 있다. 아모스는 ‘재판관’들이 מִשְׁפָּ֑ט를 소태로 만들어 버리고, צְדָקָ֖ה를 땅바닥에 팽개쳐 버렸다고 하였다 (아모스 5:4-7). 그렇다면 공의를 소태로 만드는 행위, צְדָקָ֖ה 를 땅바닥에 팽개친 행위는 무엇일까? 5장 10절에 ‘성문,’ 곧 백성을 재판하는 자리, 그리고 세금을 징수하며 통치권을 행사하는 곳에서 오히려 바르게 재판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고,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곡물세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5:10-11). 그들은 ‘의를 행하는 사람’ (צַדִּיק֙)을 오히려 학대하고, 뇌물을 받는 것은 מִשְׁפָּ֑ט를 굽혀버린 일이었다. 곧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이 행해져야 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한 것이다. 아모스에게 이것은 ‘범죄와 죄악’이었다 (5:12). 아모스는 ‘정의’와 ‘공의’가 요구되는 사람들은 단지 통치자요 재판관인 왕이나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사회의 지도층이나 부자들도 포함되었다.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은, 사법권과 행정권이 하나님의 통치 실행 방법과 태도인 מִשְׁפָּ֑ט로 집행된다면 그 백성에게 꿀처럼 달 것인데, 오히려 이 통치 권력이 백성을 쓰게 했으며, 또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자신을 맞추는 צֶדֶק / צְדָקָ֖ה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땅에 팽개쳐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한다는 것이다 (5:7).
하지만,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그들의 살길이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님을 찾으라고 말하면서 성전 제사를 드리는 베델, 길갈로 가지 말라고 한다. 거기는 죽음의 길이지 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전 제사를 드리는 제단에서 주를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5:15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전 제사를 드리는 곳에서 이스라엘이 다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길지 모른다’고 말한다. 남은 자는 살아있는 자이다. 그러나, 이 사람도 완전하게 살아 있지 못하다. 단지 앗시리아의 폭력을 견뎌냈을 뿐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살 길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길인데 그 긍휼을 얻는 ‘살 길’은 ‘שַּׁ֖עַר מִשְׁפָּ֑ט(공평의 문), 곧 재판정에서 מִשְׁפָּ֑ט 를 펼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를 찾는 살 길은 공평을 펼치는 것이다. מִשְׁפָּ֑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צְדָקָה 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살 길이다 (5:24). 이스라엘이 죽음의 날인지도 모르고 ‘주의 날’을 사모는 것 (5:18), 성회로 모이고, 절기를 지키는 것 (5:21),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 (5:22), 찬양을 드리는 것 (5:23) 이 모든 것들이 공의와 정의가 흘러 넘치지 않고는 죽은 자들의 유령 놀음에 불과하다.
아모스는 מִשְׁפָּ֔ט를 뒤엎어 독약을 만들고, צְדָקָה에서 거둔 열매를 소태처럼 만든 것은(6:12) 인간의 교만, 곧 자기 과신이라고 하였다. 말들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없고, 소가 바다로 갈 수 없는데, 자신들의 힘으로 ‘로드발’과 ‘가르나임’을 점령했다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6:12). 자기 과신과 교만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부재는 결국 진정한 מִשְׁפָּ֔ט, 곧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거나 판결할 수 있는 상황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론 진정한 צְדָקָה, 곧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죽는 것이다.
아모스에게 죄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행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호세아에게 죄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이할 때 그 신부를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로 대하셨다 (호세아 2:19).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행하는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아내를 대함에 있어서 사랑과 긍휼함으로 (그 분의 모든 행정권과 사법권의 의미가 암시된다) 관계를 맺으신다 (2:19).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한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요구하신다. 이는 아내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 곧 신실한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מִשְׁפָּ֑ט와 צֶדֶק / צְדָקָ֖ה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너희는 하나님께 돌아와(שׁוּב) 사랑과 정의(חֶ֤סֶד וּמִשְׁפָּט)를 지키라’ (12:6)고 강력히 요청하심으로 아내 된 이스라엘의 מִשְׁפָּ֑ט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신실한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런 사랑의 신실성을 버리고 결혼의 계약 관계를 파기한 채 이방의 우상과 결혼한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가 주로 왕과 왕자들을 고발한 것과 달리 미가는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방백들과 지도자들에게 מִשְׁפָּ֑ט를 요구하고 있다(3:1, 9). 그의 מִשְׁפָּ֑ט는 아모스와 호세아의 목소리와 닮아있다 (참조, 미가 1:2과 아모스 5:14; 미가 6:8과 호세아 12:6). 방백들이 벌이는 악은 백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었고 (1:2-3, 10-11),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 (뜻)를 알 수 없었다 (1:4-7). 따라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선’은 (6:9) מִשְׁפָּט֙를 행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חֶ֔סֶד)을 사랑하는 것(אָהֵב)이다 (6:9).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6:9).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의 본질과 뜻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מִשְׁפָּט֙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파수꾼의 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에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מִשְׁפָּט֙’를 행하시며, 그 백성들은 ‘그 분의 צֶדֶק’를 보게 된다 (7:9). 그러므로 미가가 מִשְׁפָּ֑ט를 행하기 위해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 (혹은 율법의 지식)를 아는 것이며(4:2),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6:8), 그와 함께 하는 것이다 (7:9).
제 1이사야는 대부분의 경우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함께 사용하였다. 그가 사용하는 מִשְׁפָּ֑ט와 צֶדֶק / צְדָקָ֖ה의 용례는 고전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מִשְׁפָּ֑ט와 צֶדֶק / צְדָקָ֖ה의 주체가 왕이나 백성들의 지도자들 뿐 아니라 ‘성읍’ (1:21)으로 까지 확대된다. מִשְׁפָּ֑ט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백성에 대한 통치와 사법권을 실행하는 것인데 만약에 성읍, 곧 성읍의 거민들이 그 일을 감당한다면 그들의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억압받는 사람을 돕고’ ‘고아와 과부의 송사를 변호하는 것’이다 (1:17; 참조 10:2; 28:6). 따라서, 이는 통치적 성격 보다는 윤리 도덕적 성격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의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치함에 있어 참여하는 행위이다.
제 1 이사야에게 나타나는 시온 신학은 (33:5)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이루는 ‘통치자들’(שֹׁפֵט)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שֹׁפֵט (통치자 혹은 재판관)가 행하는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구원과 구속을 가져오는 수단이다 (1:26-27). 또한 하나님은 이 מִשְׁפָּ֑ט와 צֶדֶק / צְדָקָ֖ה 안에서 ‘높임’과 ‘거룩’을 나타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로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שֹׁפֵט이시기 때문이다 (30:18). 이 통치자는 다윗 후손의 왕으로 이 땅에 현현하시며 (9:6-7; 16:5; 32:1) ‘의의 실현’은 종말론적인 모습을 보인다 (16:9).
특이한 것은 통치자들에게 임하는 ‘정의의 영’ (ר֖וּחַ מִשְׁפָּ֑ט)이요(28:6), 또한 백성들을 적의 침입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용기’의 언급이다. ‘하나님의 영’과 ‘용기’는 백성들에게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실행할 수 있는 내적 동기이자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외적 동기이다. 또한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모든 것들을 측량하는 도구 곧 자와 저울처럼 균형을 가져야 하고 (28:16-17) 백성을 사랑하는 것 (긍휼과 은혜)이어야 한다 (16:5; 30:18). 또한 이런 의의 실행의 결과는 ‘평화와 안전’이다 (32:17).
제1이사야 (1-39장)에게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는 항상 붙어 다니고 또 고전적 의미를 따르고 있었다면, 제2 이사야 (40-55장)에서는 מִשְׁפָּ֑ט가 צֶדֶק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고, 더나아가 제2, 3이사야에게 מִשְׁפָּ֑ט는 구원과 병행어로 사용되었다 (59:11, 17; 61:10). מִשְׁפָּ֑ט의 행위 주체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42:1-4), 그 행위 대상은 만국으로 확장되며 (42:4, 6), 또한 מִשְׁפָּ֑ט가 진리 (혹은 율법, 42:21; 45:23; 51:4, 7)와 연결된다. 그리고 제3 이사야 (56-66)에서는 안식일과 (56:1-2) 연결됨으로 ‘의’의 개념이 ‘율법’과 ‘성전 제사’와 종교적 행위 (규례 행함, 58:2)로 확장된다. 제 3이사야에서 צֶדֶק는 거의 사용 되지 않는다. 그리고 מִשְׁפָּ֑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통치자의 잘못이기 보다는 우리의 죄 때문으로 파악한다 (59:14). 이것은 포로 후기 시대에 그들에게 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מִשְׁפָּ֑ט가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 행위의 실행이거나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대한 일치 (순종)라는 고전적 개념에서 떠나서 도덕적 윤리적 개념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48:1; 48:18; 51:5, 7; 58:8; 59:17) 보여 준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신한 통치 실행자가 없음으로 하나님께서 מִשְׁפָּ֑ט와 צֶדֶק / צְדָקָ֖ה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으시며 (59:16) 친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을 확립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한 왕이시고, 전사시며 재판관이라고 인정하는 스바냐에게 하나님은 의인(צַדִּיק)이시다. 그래서 아침마다 그 백성들에게 מִשְׁפָּט를 주시는 분이시다 (3:5). 스바냐는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관료들, 재판관들,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מִשְׁפָּט는 심판과 죽음이었다 (3:1-13).
예레미아에게서 ‘정의’도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3:11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צִדְּקָ֥ה가 배신이라는 말과 함께 나온다. 그렇다면 이것은 호세아적 개념이다. 곧 음행한 유다를 향해 돌아오라고 외치면서(3:6-14), 이런 우상 숭배에서 돌아옴을 בְּמִשְׁפָּ֣ט וּבִצְדָקָ֑ה로 서약하라고 요구한다 (4:1). 이것은 예레미아가 사용한 ‘정의’와 ‘공의’는 호세아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신실한 태도로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신실함의 ‘정의’와 ‘공의’에 ‘견고함’(אֱמוּנָה)이 요구된다 (4:2, 5:1). 특이하게도 예레미아에게 מִשְׁפָּט가 소유형 (construct form)으로 사용되었다. 5:4-5에는 מִשְׁפַּ֖ט אֱלֹהֵיהֶֽם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두번 사용되며, 5:28에는 ‘필요한 자들 혹은 가난한 자들의 정의’ (מִשְׁפַּ֥ט אֶבְיוֹנִ֖ים)라는 표현이다. 이것을 거의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권리’ (right)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이 공유하는 מִשְׁפָּט는 מִשְׁפָּט의 고전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Construct form의 사용은 근본적으로 מִשְׁפָּט가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고, 다윗 왕가(21:12, 15)나 지도자나(22:13-15) 더 나아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9:1-24) 하나님의 מִשְׁפָּט를 낮은 자들의 מִשְׁפָּט가 되게 하는—하나님 통치(מִשְׁפָּט,9:24; 10:24)의 대리자인데, 그들이 이 임무를 감당하지 않을 때 철저한 심판의 죽음이 따른다 (9:1-24). 그리고 이런 죽음을 가져오신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신 분’(צַדִּיק)이라고 선언된다 (12:1). 이런 מִשְׁפָּט는 비단 통치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웃이 이웃에게 서도 행해야 할 것으로 설명하는데 (7:5) 이는 이사야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וּצְדָקָ֖ה מִשְׁפָּ֥ט 를 행하시기 위한 종말론적 기대가 나타난다. 곧, 다윗 왕가에서 의로운 가지를 돋게 할 것이며, 그가 만국에 하나님의 מִשְׁפָּ֥ט וּצְדָקָ֖ה를 실현할 것이라는 (23:5; 33:15) 비전이 제시된다.
예루살렘의 멸망 후 포로로 잡혀간 이후의 시대를 살었던 예언자들은 מִשְׁפַּ֖ט אֱלֹהֵיהֶֽם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특별히 하박국 선지자는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과 압제 아래서도 여전히 법이 왜곡되고, 서로 다투기만 할 뿐 מִשְׁפַּ֖ט는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들에 의해서 מִשְׁפַּ֖ט가 굽혀져 버렸다고 불평하였다 (1:4). 이렇게 굽혀진 מִשְׁפַּ֖ט란 מִשְׁפַּ֖ט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나온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1:7). 하박국에게 있어서도 מִשְׁפַּ֖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으로 가져오는 행위이며, 사회 지도층들이 이런 하나님의 מִשְׁפַּ֖ט를 그 공동체에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מִשְׁפַּ֖ט를 믿는 자들이 ‘의인’(צַדִּיק)이며 또한, ‘무력으로 억압받는 무고한 사람들’이지만 (아모스 2:6; 5:12; 사 3:10, 5:23; 29:21; 합 1:4, 14). 그들은 하나님의 מִשְׁפַּ֖ט를 믿음으로 생명을 구원받게 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2:4).
에스겔에게 צְדָקָה는 ‘의로운 행동’이다 (3:20). 이 ‘의’는 하나님의 통치나 사법권과의 관계를 떠나서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다 (14:14). 곧, 다른 사람의 의로 인하여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 (צִדְקָתָ֖ם)로 사는 것이다 (18:1-22)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얼핏 에스겔에게서 ‘의’는 도덕적, 윤리적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여전히 고전적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18:5에 언급된 מִשְׁפָּ֖ט וּצְדָקָֽה는 우상 숭배와 사채놀이, 부자들의 학대, 공정한 판결등과 연결되어 있다 (18:6-8). 그런데, 이 מִשְׁפָּ֖ט וּצְדָקָֽה는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지켜서 행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18:9). 이것은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성전 예배 중심에서 서서히 율법 중심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며, 하나님의 מִשְׁפָּ֖ט는 법에 대한 순종과 병행어로 사용된다 (18:27; 33:16, 19).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통치자들이 시행해야 할 מִשְׁפָּ֥ט וּצְדָקָ֖ה는 율법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45:9) 이것은 이사야 관점의 계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스가랴와 말라기에서 사용된 ‘공의’의 사용도 다른 선지서들의 용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스가랴 7:8; 말라기 2:17). 공정한 재판과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책임 등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서에 나타난 ‘의’ 개념은 מִשְׁפָּ֑ט와 צֶדֶק / צְדָקָ֖ה가 대표적으로 사용되는데, מִשְׁפָּ֑ט는 하나님의 통치, 곧 사법과 행정을 통괄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백성들에게 실행 되어지게 하는 방법과 태도—곧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치하실 때 보여주시는 그 방법과 태도이다. צֶדֶק / צְדָקָ֖ה는 자신을 이런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일치시키는 순종이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의 실행 주체는 단지 왕이나 방백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확대되며, 그 통치 대상도 만국으로 확장된다. 아모스는 ‘통치의 실행’에서 나타나야 할 의를 강조하며, 호세아는 관계의 신실성에서 나타나는 의를 강조한다. 미가에게서 의는 ‘계시’와 ‘사랑’이라는 의미가 함께 나타나고 제1이사야에게 ‘의’는 아모스나 호세아, 그리고 미가에게 나타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의의 영’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한편, 제 2, 3 이사야에게 의는 구원과 연결되어 있고, 안식일과 율법, 종교적 행위로 확장되는데 이것은 에스겔에게 계승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는 도덕적 혹은 윤리적 개념으로 자신의 거룩과 정결함, 또 구별된 생활을 보여주는 선한 행동 혹은 선을 행하는 것 도덕, 윤리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보여주는 통치 실행 행위의 방법과 태도이다. 이것이 때로는 공정한 재판을 집행하는 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행위로, 구제와 억압된 자들에 대한 돌봄과 배려, 그리고 평등과 자유로, 또 상호 평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신실성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요, 공의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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