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색함과 나눔 (신명기 15:1-18)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꿈 속에서 본 여자’입니다. 그 분은 눈뜨고 볼 수가 없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립니다. 왜 꿈틀 거리는지 아세요?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었으면 꿈틀거리지 않았을 텐데… 1977년도 토픽에 실린 뉴스인데, 한 강도가 판사를 향해 ‘당신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판사가 법복을 벗더니 재판정에 있는 이 강도를 폭행했답니다. 그러면 이 판사도 재판을 받아야 하나? 여러분에게 다시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신명기가 어떤 책입니까?
벳 브올에서 선포된 이 신명기는 십게명을 다시 반복해서 선포하고 6장에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와를 사랑할 것인가? 우리 주님은 그것이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은 사회법을 통해서 구현이 됩니다. 5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4장까지는 모두 종교법입니다. 제사법과 의식법, 곧 어떻게 정결하고, 어떻게 부정하게 되는가를 가르치는 법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 곧 15장에서 비로서 ‘사회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이 사회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이웃, 너희 친척, 너희 동역자들,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와 함께 더불어 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돈’과 관련되어 인색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이웃에게 돈을 꿔준 사람은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다면 그 빚을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가난한 친족이 있다면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색한 마음을 여기서는 손에 쥔 것을 움켜쥐고 베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죽는 소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가 안되고, 뭐가 안되고… 미리 선수 치는 거죠. 인색한 마음입니다. 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 고용인들에게도 절대로 빈손으로 내어 보내지 말고,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색한 마음의 반대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복을 받은 대로 넉넉하게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한 달에 몇 만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매일 돈이 없다고 노래 합니다. 사업이 안된다고 고용인들을 다그칩니다. 그런데 2-3천불 들여서 여행을 다닙니다. 그 2-3천불은 고용인들의 한달 월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죠. 이런 태도로 사업을 하면 고용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일할 맛이 떨어집니다. 인색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용주들에게 말합니다.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나누어 주라. 이것은 성과급을 지급하라는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신명기 정신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총체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지자요, 율법의 총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신명기 15장에 나타난 ‘사회법’ 곧 이웃과 친척과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아니하고,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나누는 것과 통합니다.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까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것에서 전혀 인색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아들까지 주시는 분이 무엇인들 우리에게 아끼시겠습니까? 빈들에서 예수님은 그 곳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떡을 나누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과 피까지도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그 삶에서 철저히 나눔을 생활화 하시고,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나누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는 10대 이적이 나옵니다. 그렇게 이적의 기사를 보시면, 어느 한 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피곤하니까 오늘 가지 못하겠어’ 혹은 ‘나중에 갈께’라고 말씀하시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시간 외에는 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가셔서 자기 자신을 나누는 장면을 쉽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 마음이 아니십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도 고쳐 주시지 않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나누십니다.
삶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나눔을 보면 ‘나눔’이란 돈만 가지고 나누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나눔이나 인색함을 생각하면 언제나 ‘돈’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돈’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먹는 것이 큰 일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돈을 주는데 있어서 인색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것에도 인색하고, 고용인들에게 마음을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가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지식을 나눌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을 나눌 수도 있고, 때로는 관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짚신장사 부자가 있었다고 한다. 수 십 년 아버지 밑에서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은 장에 나가 짚신을 파는데 아버지 것은 항상 잘 팔리는 데 자신의 것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 것과 다름없이 보이는데 왜 자기 것은 잘 팔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유언은 “털, 털, 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 아들이 마침내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짚신을 다 만들고는 마지막 털 정리를 깔끔하게 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이것이 노하우였습니다. 이것을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렇게 인색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을 받기만 하고 절대로 나누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받음과 건네줌의 양식 속에서 전달됩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절대로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서 나누지 않습니다. 정말로 기쁜 소식이라면 당연히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라톤 경기에 얽힌 사연을 너무나 잘 압니다. 스파르타와 마라톤에서 한판 붙은 아테네가 그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 병사가 이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기 위해 42.194키로는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주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혹시 ‘바보같이 좀 천천히 가면 될 것을’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얼마나 그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으면, 그 소식을 목메어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뛰어 갔겠습니까?
복음, 기쁜 소식. 이 기쁜 소식을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정이 불화하여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 사업에 실패하여 너무나 고통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영혼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쉼없이 방황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뭔가 그들 인생을 평화롭게 하고, 풍요롭게 할 소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있는 그 ‘복음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는 일에 인색해서도 안되고, 그것을 나누는 것에 대해 지레 짐작으로 두려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우리는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킨쉽(skinship)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접촉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자기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왜 어머니의 손이 약손일까요? 어머니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면 치료가 일어납니다. 미국 뉴욕의 크래져 박사라고 하는 분은 ‘사람의 손에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세포가 수백만개가 있는데, 서로 손을 맞잡게 되면 혈액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의 산소 운반량이 급격히 증가를 한다’ 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접촉하면 그 곳에 생명의 기온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실험을 했답니다. 비슷한 환자를 두고 한 가족에게는 열심히 가서 위로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라고 하고,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로 환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결과는 가족들이 만지고 접촉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 보다 두배나 빨리 회복이 되어서 퇴원을 했답니다. 이게 접촉의 능력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종종 안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만져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만져 주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거룩함은 주님과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몸에 우리가 연합하는 것. 이런 접촉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들은 꼭 돈만이 아니라 이런 접촉, 물론 아무나 만지면 안되겠지만, 내가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상대를 자주 만져 주는 것도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입니다. 말이 너무 하기 쉬운 것이지만 이 말로 상대방을 어루만져 주기는 참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인색한 것이 이 말로 상대를 어루만져 주지 않는 겁니다. 늘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기는 좋아하면서 반대로 정작 이 말로 상대방을 어루만져주지 않습니다. 얼마나 인색한지 몰라요. 반면에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겁니다. 들어주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여주고, 느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이웃과, 내 친척과, 내 고용인들 동역자들과 나누고 인색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론: 일과 사랑, 자선을 혼동하지 말자.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인색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칩니다. 이웃에게, 친척에게, 그리고 자신이 함께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물론 본문은 돈을 가지고 인색하게 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더욱 확장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 가진 것을 나누는 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을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최근 ‘욘스(yawns)’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젊고 부유한 사람 (young and wealthy), 그렇지만 ‘보통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을 Yawn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적 부자들 가운데 이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입니다. 미국 경제 잡지인 ‘포브스’에 보면 미국 역사에서 1억 달러 이상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부자는 21명이었는데 그 중에 워렌 버핏이 435억 달러로 최고의 액수를 기부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투자’와 ‘자선’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가 투자한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철저하게 타산적입니다. 마치 베니스의 상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투자이고 일입니다. 일에서 철저한 사람을 향해 아 이 사랑이 없다고 혼동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일에서 엄격할 때 사랑이 없다고 말을 하거나, 인색하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일에서 엄격함이 사랑입니다. 터프한 사랑이지요. 독수리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워렌 버핏의 경우에 그는 그렇게 엄격하게 투자하고, 지독하게 일을 해서 번 돈을 마치 물붓듯이 아무 조건없이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자선’이요, 사랑입니다. 자선이란 세상을 향해 혹은 사람을 향해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정작 그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그의 3명의 자녀들에게는 자기 재산의 극히 일부분만 물려준다는 겁니다. 자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드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나눔과 인색함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