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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09의 보관물

크리스탈나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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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나흐트 대학살의 전주곡
마틴 길버트 지음 김세준 옮김, 플래닛
314쪽, 1만3000원

1938년 11월 6일 오전, 당시 프랑스 파리에 살던 17세 유대인 소년은 손에 권총을 쥐었다. 총알 다섯 발을 장전한 뒤 독일대사관을 찾아갔다. “중요한 서류를 전달하러왔다”며 들어가 3등 서기관인 에른스트 폰 라트에게 “더러운 독일놈!”이라고 외치며 권총을 발사했다. 두 발을 명중시켰으나 상대를 즉사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 소식에 히틀러는 격분했다.
독일 신문들은 테러 소식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서기관이 이틀 뒤 숨지면서 흥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격렬한 반 유대 운동을 시작했다. 수많은 유대 교회들과 유대인 상점들을 불태웠고, 100명 가까운 유대인을 때려 죽였다. 끔찍한 광기의 시작이었다.
대사관 테러 이전 독일 유대인 15만 명이 추방됐으나, 그게 국가 테러였다면 이번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테러’였다. 직후 12만 명의 유대인이 해외로 도망쳐야 했다.
이 책은 크리스탈 나흐트(수정의 밤· kristallnacht)를 중심으로 쓴 유대인 핍박사다. 크리스탈나흐트란 말에는 유대인이라는 다루기 쉬운 유리를 발로 밟는다는 독일인의 우월감과 경멸의 감정이 담겼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최악의 악몽인데, 당시 단 하루 동안 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일기에 “한 번쯤은 유대인들이 군중의 분노를 느껴야 한다”고 뻔뻔하게 적었지만, 유대인 소년은 왜 권총을 잡았을까?
그는 테러 전인 10월 18일 독일 당국이 1만여 명의 유대인을 추방한 것에 분노를 품었다. 거기 휩쓸린 부모가 폴란드 국경지대에서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소식에 테러를 결행했다. 이처럼 많은 증언자들의 사례와 증언을 토대로 유태인 핍박역사를 재구성한 게 이 책의 매력이다. 거대 담론 대신 촘촘한 디테일 재현이 특징인데, 다 아는 얘기를 다시 듣는 식상한 기분을 피할 수 없는 게 한계다. 다소 평면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대량학살이라는 괴물은 언제라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더 큰 악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여전히 되새겨볼만하다.
조우석(문화평론가)

yangjongrae 작성

2009/09/19, 4:4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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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자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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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자살자 대부분은···’40대 백인 독신남’
금문교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40세 싱글 백인 남성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린카운티 검시관에서 1994년7월1일부터 올해6월30일까지 15년간 금문교에서 자살한 330명의 신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80.3%가 백인 74.2%가 남자로 이들의 중간나이는 40세로 조사됐다.
또한 56.4%는 결혼을 한 적이 없고 19.4%가 이혼한 경력이 있는 싱글이며 83.4%가 베이지역 출신(샌프란시스코 26.3%)인 것으로 보고됐다.
이밖에도 금문교에서 베이로 뛰어내려 사망하는 사람은 연평균 25명으로 1937년 건설된 이후 지금까지 1500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19세기부터 남성들의 자살률 범죄율 살인율은 여성보다 높게 나타났다”면서 “도움을 청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심리학자들은 “결혼생활은 안정감과 면역력을 주기 때문에 혼자 사는 독신의 자살율이 높은 것이 통념”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금문교 고속도로 교통국은 자살을 방지하는 안전망을 설치하는 계획안을 통과했으나 현재 5000만달러의 기금을 조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아람 기자
기사입력: 09.10.09 20:25

yangjongrae 작성

2009/09/11, 7:4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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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함과 엄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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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욘스(yawns)’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젊고 부유한 사람 (young and wealthy), 그렇지만 ‘보통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을 Yawn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적 부자들 가운데 이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입니다. 미국 경제 잡지인 ‘포브스’에 보면 미국 역사에서 1억 달러 이상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부자는 21명이었는데 그 중에 워렌 버핏이 435억 달러로 최고의 액수를 기부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투자’와 ‘자선’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가 투자한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철저하게 타산적입니다. 마치 베니스의 상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투자이고 일입니다. 일에서 철저한 사람을 향해 아 이 사랑이 없다고 혼동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일에서 엄격할 때 사랑이 없다고 말을 하거나, 인색하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일에서 엄격함이 사랑입니다. 터프한 사랑이지요. 독수리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 하지만, 워렌 버핏의 경우에 그는 그렇게 엄격하게 투자하고, 지독하게 일을 해서 번 돈을 마치 물붓듯이 아무 조건없이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자선’이요, 사랑입니다. 자선이란 세상을 향해 혹은 사람을 향해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정작 그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그의 3명의 자녀들에게는 자기 재산의 극히 일부분만 물려준다는 겁니다. 자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드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5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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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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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짚신장사 부자가 있었다고 한다. 수 십 년 아버지 밑에서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은 장에 나가 짚신을 파는데 아버지 것은 항상 잘 팔리는 데 자신의 것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 것과 다름없이 보이는데 왜 자기 것은 잘 팔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유언은 “털, 털, 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 아들이 마침내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짚신을 다 만들고는 마지막 털 정리를 깔끔하게 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이것이 노하우였습니다. 이것을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렇게 인색하게 됩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5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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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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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꿈 속에서 본 여자’입니다. 그 분은 눈뜨고 볼 수가 없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립니다. 왜 꿈틀 거리는지 아세요?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었으면 꿈틀거리지 않았을 텐데… 1977년도 토픽에 실린 뉴스인데, 한 강도가 판사를 향해 ‘당신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판사가 법복을 벗더니 재판정에 있는 이 강도를 폭행했답니다. 그러면 이 판사도 재판을 받아야 하나?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5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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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함과 나눔 (신명기 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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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꿈 속에서 본 여자’입니다. 그 분은 눈뜨고 볼 수가 없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립니다. 왜 꿈틀 거리는지 아세요?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었으면 꿈틀거리지 않았을 텐데… 1977년도 토픽에 실린 뉴스인데, 한 강도가 판사를 향해 ‘당신은 나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판사가 법복을 벗더니 재판정에 있는 이 강도를 폭행했답니다. 그러면 이 판사도 재판을 받아야 하나? 여러분에게 다시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신명기가 어떤 책입니까?
 벳 브올에서 선포된 이 신명기는 십게명을 다시 반복해서 선포하고 6장에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와를 사랑할 것인가? 우리 주님은 그것이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이런 이웃 사랑은 사회법을 통해서 구현이 됩니다. 5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4장까지는 모두 종교법입니다. 제사법과 의식법, 곧 어떻게 정결하고, 어떻게 부정하게 되는가를 가르치는 법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 곧 15장에서 비로서 ‘사회법’이 나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이 사회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이웃, 너희 친척, 너희 동역자들,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와 함께 더불어 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는 ‘돈’과 관련되어 인색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이웃에게 돈을 꿔준 사람은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다면 그 빚을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가난한 친족이 있다면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색한 마음을 여기서는 손에 쥔 것을 움켜쥐고 베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죽는 소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가 안되고, 뭐가 안되고… 미리 선수 치는 거죠. 인색한 마음입니다. 또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 고용인들에게도 절대로 빈손으로 내어 보내지 말고,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색한 마음의 반대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이 복을 받은 대로 넉넉하게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한 달에 몇 만불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매일 돈이 없다고 노래 합니다. 사업이 안된다고 고용인들을 다그칩니다. 그런데 2-3천불 들여서 여행을 다닙니다. 그 2-3천불은 고용인들의 한달 월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죠. 이런 태도로 사업을 하면 고용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일할 맛이 떨어집니다. 인색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용주들에게 말합니다.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나누어 주라. 이것은 성과급을 지급하라는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 신명기 정신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총체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지자요, 율법의 총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신명기 15장에 나타난 ‘사회법’ 곧 이웃과 친척과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아니하고, 복을 받은 대로 넉넉히 나누는 것과 통합니다.
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아까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시는 것에서 전혀 인색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아들까지 주시는 분이 무엇인들 우리에게 아끼시겠습니까? 빈들에서 예수님은 그 곳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떡을 나누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과 피까지도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그 삶에서 철저히 나눔을 생활화 하시고,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나누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는 10대 이적이 나옵니다. 그렇게 이적의 기사를 보시면, 어느 한 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피곤하니까 오늘 가지 못하겠어’ 혹은 ‘나중에 갈께’라고 말씀하시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시간 외에는 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가셔서 자기 자신을 나누는 장면을 쉽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장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지 실제 마음이 아니십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도 고쳐 주시지 않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나누십니다.

삶을 나누는 것이다.
 이런 예수님의 나눔을 보면 ‘나눔’이란 돈만 가지고 나누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나눔이나 인색함을 생각하면 언제나 ‘돈’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돈’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먹는 것이 큰 일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돈을 주는데 있어서 인색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것에도 인색하고, 고용인들에게 마음을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여러가지를 나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지식을 나눌 수 있고, 때로는 마음을 나눌 수도 있고, 때로는 관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짚신장사 부자가 있었다고 한다. 수 십 년 아버지 밑에서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은 장에 나가 짚신을 파는데 아버지 것은 항상 잘 팔리는 데 자신의 것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아버지 것과 다름없이 보이는데 왜 자기 것은 잘 팔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유언은 “털, 털, 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던 이 아들이 마침내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짚신을 다 만들고는 마지막 털 정리를 깔끔하게 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인데 이것이 노하우였습니다. 이것을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로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렇게 인색하게 됩니다.
 어떤 분들은 복음을 받기만 하고 절대로 나누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받음과 건네줌의 양식 속에서 전달됩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절대로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서 나누지 않습니다. 정말로 기쁜 소식이라면 당연히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라톤 경기에 얽힌 사연을 너무나 잘 압니다. 스파르타와 마라톤에서 한판 붙은 아테네가 그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한 병사가 이 기쁜 소식을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기 위해 42.194키로는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주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혹시 ‘바보같이 좀 천천히 가면 될 것을’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얼마나 그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으면, 그 소식을 목메어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뛰어 갔겠습니까?
 복음, 기쁜 소식. 이 기쁜 소식을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정이 불화하여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 사업에 실패하여 너무나 고통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영혼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쉼없이 방황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뭔가 그들 인생을 평화롭게 하고, 풍요롭게 할 소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있는 그 ‘복음의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는 일에 인색해서도 안되고, 그것을 나누는 것에 대해 지레 짐작으로 두려워 해서도 안됩니다.
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우리는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킨쉽(skinship)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접촉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자기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왜 어머니의 손이 약손일까요? 어머니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면 치료가 일어납니다. 미국 뉴욕의 크래져 박사라고 하는 분은 ‘사람의 손에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세포가 수백만개가 있는데, 서로 손을 맞잡게 되면 혈액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의 산소 운반량이 급격히 증가를 한다’ 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접촉하면 그 곳에 생명의 기온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실험을 했답니다. 비슷한 환자를 두고 한 가족에게는 열심히 가서 위로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져 주라고 하고, 다른 가족에게는 절대로 환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결과는 가족들이 만지고 접촉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 보다 두배나 빨리 회복이 되어서 퇴원을 했답니다. 이게 접촉의 능력입니다.
 성경에도 보면 종종 안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만져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만져 주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거룩함은 주님과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몸에 우리가 연합하는 것. 이런 접촉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됩니다.
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들은 꼭 돈만이 아니라 이런 접촉, 물론 아무나 만지면 안되겠지만, 내가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상대를 자주 만져 주는 것도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 또 우리가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은 ‘말’입니다. 말이 너무 하기 쉬운 것이지만 이 말로 상대방을 어루만져 주기는 참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인색한 것이 이 말로 상대를 어루만져 주지 않는 겁니다. 늘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기는 좋아하면서 반대로 정작 이 말로 상대방을 어루만져주지 않습니다. 얼마나 인색한지 몰라요. 반면에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겁니다. 들어주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여주고, 느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 내 이웃과, 내 친척과, 내 고용인들 동역자들과 나누고 인색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론: 일과 사랑, 자선을 혼동하지 말자.
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인색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칩니다. 이웃에게, 친척에게, 그리고 자신이 함께 일하는 고용인들에게 인색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물론 본문은 돈을 가지고 인색하게 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더욱 확장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 가진 것을 나누는 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을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사랑의 마음을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 최근 ‘욘스(yawns)’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젊고 부유한 사람 (young and wealthy), 그렇지만 ‘보통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을 Yawn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적 부자들 가운데 이 욘스의 1세대가 ‘투자의 귀재’라고 부르는 워렌 버핏입니다. 미국 경제 잡지인 ‘포브스’에 보면 미국 역사에서 1억 달러 이상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 부자는 21명이었는데 그 중에 워렌 버핏이 435억 달러로 최고의 액수를 기부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투자’와 ‘자선’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가 투자한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철저하게 타산적입니다. 마치 베니스의 상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투자이고 일입니다. 일에서 철저한 사람을 향해 아 이 사랑이 없다고 혼동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혼동합니다. 그래서 일에서 엄격할 때 사랑이 없다고 말을 하거나, 인색하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일에서 엄격함이 사랑입니다. 터프한 사랑이지요. 독수리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 하지만, 워렌 버핏의 경우에 그는 그렇게 엄격하게 투자하고, 지독하게 일을 해서 번 돈을 마치 물붓듯이 아무 조건없이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자선’이요, 사랑입니다. 자선이란 세상을 향해 혹은 사람을 향해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정작 그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그의 3명의 자녀들에게는 자기 재산의 극히 일부분만 물려준다는 겁니다. 자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드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진정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 여러분, 오늘은 나눔과 인색함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5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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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5]고센: 이민자의 꿈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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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거대함을 자랑하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떠나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왔던 땅 고센으로 향하였다. 고센 땅은 나일강 델타 지역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비옥한 땅이다.

이 고센으로 향하여 가는 차창을 통하여 내 눈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은 이곳 이집트 여성들의 복장이었다. 검은 코트를 걸쳐 정강이까지 가리우고, 머리에는 우리가 베일이라 불리우는 ‘헤잡’을 쓰고 거리를 누비는 여성들은 흔한 광경이다. 모두가 검은색의 헤잡이었지만 그 중에는 주홍색 코트와 헤잡을 입은 여성들도 있었다. 아마 그들은 사회적 굴레보다는 본인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더 고집하는 사람들일까? 이집트에서 ‘헤잡’을 쓰는 것은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이집트 여성들 사이에는 이 헤잡을 다시 쓰는 유행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였다.

고센 지방을 향해 가는 차 속에서 줄곧 내 머리속에 맴도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라는 유행가 한 소절 때문에 실소하였다. 이런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출애굽과 연결된 히브리 노예들의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다.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의 족장은 그 아들 요셉이 우연치 않게 애굽의 노예로 팔려왔다가 국무총리의 직책까지 오르게 되자 그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팔레스틴에 몰아닥친 기근을 피하여 이 고센땅으로 이주해 왔었다. 그로부터 430년이 흐른 후에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혹은 풍요로움을 위하여 선택한 길이 그 후손에게 재앙이 되고 만 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갈대아 땅 아람 족속 중에서 부르셨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민족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구별’ 혹은 ‘분리’라는 의미의 ‘히브리(이브리) 족’의 시작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분리하여 팔레스틴 지방을 새로운 근거지로 하여 살아가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기근과 가뭄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팔레스틴 땅은 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유대 광야나 모압광야등 사막 지역과 그외 작은 지역들을 제외하고는 물이 매우 풍부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갈릴리 바다는 헐몬산에서 눈이 녹아 내리는 물과 또 다른 많은 지류들이 합류하여 사시사철 메마르지 않는 수량을 담고 있었고, 그 물은 팔레스틴 지역을 흘러 흘러 사해로 흘러 들어갔다.
비록 산이나 구릉지대라 하더라도 그 지표면은 단단하거나 혹은 부드러운 석회암으로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 밑에는 많은 우물들과 물 구덩이들 또 그 밑을 흐르는 물들이 있어서 물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근이 들면 어째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찾아 들어 갔을까? 애굽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했건만 어째서 그렇게 애굽으로 피하여 들어갔을까?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주민이었기 때문에 이민 초기에는 그렇게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벧엘 근처, 네게브 사막 인접 지역이나 광야 지역에서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물 부족에 시달렸을 것이고, 가뭄이라도 들게 되면 그는 도저히 그 지역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워 애굽으로, 남방으로 그렇게 내려갔을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땅, 팔레스틴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런 애굽행은 그의 아들 이삭이나 손자 야곱에게는 전혀 다른 교육 결과를 낳았다. 특별히 야곱은 굳이 가뭄이나 기근이란 이유가 없어도 하나님이 주신 땅 보다는 애굽의 풍요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 고센이란 땅에서 정착해서 살았다.
이렇게 히브리인 들이 애굽과 관련을 맺은 것은 기원전 1900년 경부터 시작되었으리라는 증거들이 크눔호텝이라는 애굽의 지방 영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야곱의 가족들이 고센에 이주와서 살았던 때는 언제쯤이었을까? 기원전 1900-1750년 경으로 잡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기원전 1550-1300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고센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애굽의 정복자로 변했을 가능성이 많다. 요셉이 이주해 왔을 때 애굽의 바로는 15-16왕조의 힉소스인이었다. 힉소스인들의 수도 ‘아바리스’는 바로 이 고센 땅에 위치해 있었다. 소수 민족이었던 힉소스는 피라미드와 같은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피폐되어 있던 애굽의 정권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수인 애굽인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이주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을 잘 대우해 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수도였던 고센의 ‘아바리스’ 근처에서 살게 하였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 힉소스족과 히브리인들이 동일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히브리인들은 이 애굽으로 건너와서 대 성공을 거두게 되고, 그들이 원하는 애굽의 풍요를 그들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4백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정신을 차린 애굽인들은 소수 민족 통치자였던 힉소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출애굽기에는 이를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라고 표현을 한다. 이것은 힉소스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이런 힉소스 정권의 몰락은 히브리인의 입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풍요의 땅 애굽에서 권력자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이민의 땅 고센은 그들의 풍요의 기대를 성취시켜준 성공의 땅이었지만 그러나 소수민족이었던 그들이 노예로 전락한 고통의 땅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웃으면서 애굽 고센에 들어섰지만 결국 그들의 고통과 신음의 소리가 하늘을 찌를만큼 삶이 멍에가 되어버린 슬픔의 땅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어찌 히브리인들 뿐이겠는가!?! 우리들 자신도 어쩌면 이 세상에 살면서 늘 풍요를 꿈꾼다.이런 풍요에 대한 기대는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성기를 숭배하며, 여신을 섬겼다. 이 모두가 ‘다산’과 ‘풍요’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던가!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돈’의 신인 ‘맘몬’을 섬기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바로 풍요에 대한 인간의 지칠줄 모르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풍요에 대한 기대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 졌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트린 풍요는 늘 그 뒤끝이 파멸로 끝나버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동안 우리를 실은 버스는 어느덧 고센 땅의 수도 ‘온’에 자리잡은 ‘오벨리스크’에 도착하였다. 야곱의 아들 요셉의 아내는 바로 이 고센 땅 ‘온’의 제사장 딸이었다. 애굽의 제사장들은 태양신 ‘라’를 섬겼으며 오벨리스크는 바로 이 태양신 ‘라’의 보호를 의미하는 거룩한 언어였다. 오벨리스크를 애굽인들은 ‘테젠’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보호’ ‘방호’를 의미한다. 그들은 무엇으로 부터 보호 받기를 원했을까? 애굽인들은 태양신의 기운을 가리우는 구름과 폭풍들을 태양신의 힘을 이용하여 몰아내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사각형의 기반을 세워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정확히 직각으로 20미터 가까이 나가는 한 덩어리의 돌로 만든 직사각형의 석탑을 태양을 향해 세웠다. 그리고 그 끝은 피라미드 형으로 뾰족하게 깍았다. 이 뾰쪽한 끝은 태양 광선을 의미하였다. 이 오벨리스크는 구름에 구멍을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폭풍이 태양신의 힘을 위협할 때, 이런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힘들에게 구멍을 내어 흩어지게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헬라인들에게 이 돌덩어리는 단지 뾰쪽한 꼬챙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고기를 구울 때 쓰이는 뾰쪽한 꼬챙이란 의미의 ‘오벨리스코스’라 불렀으며 우리들도 그것을 따라서 ‘오벨리스크’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체로 이 오벨리스크들은 태양신 ‘라’의 신전 중앙에 쌍으로 세워졌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곳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초라한 오두막 같은 곳에 공무원 한 두사람과 이곳을 지키는 경찰들만이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로 부터 단지 이것 하나를 보여주며 꼬박 꼬박 입장료를 챙기고 있었다. 태양신 ‘라’의 오벨리스크는 구름과 폭풍으로 부터 그들을 지켜 주기는 하지만 바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날 따라 무척 심한 바람이 비닐 봉지를 이곳 저곳으로 휘몰아 가고 오벨리스크 뒤편에 보이는 넓은 밭에 심겨진 양배추 만이 고센땅의 비옥함을 말해주고 싶어하는듯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50 am

여행기에 게시됨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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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오후에 2번 하이웨이 근처에서 발생한 화재는 아직까지 5%도 진화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번지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는 ‘out of control’ 곧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는 헤드라인도 보았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다 타서 불이 꺼질 때 까지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상태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저희 교회 식구들 중에도 지금 시 정부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가정들’도 있습니다. 전에 샌디에고에서 산불이 났을 때 걱정은 했지만 이렇게 산불이 피부에 와 닿기는 미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 91년 이래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바로 눈 앞에서 산이 이곳 저곳 불타고, 시커먼 구름과 하얀 구름들이 혼재되어 온 Los Angeles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곧 꺼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급기야 금요일에는 교회의 모든 행사를 취소해야 할 만큼 위험한 지경이 되었고, 토요일에는 바로 동네 뒷산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 저는 이 불이 한달이나 두달, 계속해서 지속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런 상황을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땅과 공기와 물, 그리고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요소들이 인간을 거스려 올 때 그 때 이 세상은 소망이 없게 된다, 희망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묘사된 마지막 날의 모습 중에도 보면 요한 계시록 8장 8절에서 9절에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을 때 바다의 1/3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가진 피조물들의 1/3이 죽고 바다의 배 중에 1/3이 깨어지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계시록 9장에 보면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지구상에 있는 사람의 1/3을 죽이기로 되어 있는 네 천사가 놓이고 그들의 주관하는 마병대가 내뿜는 것이 불과 연기와 유황입니다.
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보면 지금 이 작은 산불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그 마지막 날이 얼마나 끔찍할지, 또 그 날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날이 될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뒷 산에 난 이 작은 산불이 뿜어낸 메케한 연기와 재들이 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이것 때문에 아침마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산불이 만들어낸 공기의 오염을 상상해 본다면 헬라 철학자들과 성경에서 언급된 물과 공기의 오염, 물의 오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 우리들이 다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살고 있었고, 이 세상은 정말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런 위기 의식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산불 하나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순간 우리가 깨닫고 있습니다. 또 그 작은 산불이 만들어낸 이 메케한 연기와 공기에 떠다니는 재들 때문에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을 움직여 가는 것은 내 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 움직여져 가고 있고, 그런 것들이 나를 공격해 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소망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48 am

예화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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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잡았을 때 온다 (에베소서 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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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혜는 무엇인가?

 수요일 오후에 2번 하이웨이 근처에서 발생한 화재는 아직까지 5%도 진화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번지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 신문에는 ‘out of control’ 곧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는 헤드라인도 보았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다 타서 불이 꺼질 때 까지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상태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저희 교회 식구들 중에도 지금 시 정부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은 가정들’도 있습니다. 전에 샌디에고에서 산불이 났을 때 걱정은 했지만 이렇게 산불이 피부에 와 닿기는 미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 91년 이래로 처음인 것 같습니다. 바로 눈 앞에서 산이 이곳 저곳 불타고, 시커먼 구름과 하얀 구름들이 혼재되어 온 Los Angeles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곧 꺼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급기야 금요일에는 교회의 모든 행사를 취소해야 할 만큼 위험한 지경이 되었고, 토요일에는 바로 동네 뒷산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 저는 이 불이 한달이나 두달, 계속해서 지속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런 상황을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땅과 공기와 물, 그리고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요소들이 인간을 거스려 올 때 그 때 이 세상은 소망이 없게 된다, 희망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묘사된 마지막 날의 모습 중에도 보면 요한 계시록 8장 8절에서 9절에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을 때 바다의 1/3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가진 피조물들의 1/3이 죽고 바다의 배 중에 1/3이 깨어지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계시록 9장에 보면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지구상에 있는 사람의 1/3을 죽이기로 되어 있는 네 천사가 놓이고 그들의 주관하는 마병대가 내뿜는 것이 불과 연기와 유황입니다.
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보면 지금 이 작은 산불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그 마지막 날이 얼마나 끔찍할지, 또 그 날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날이 될 것인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뒷 산에 난 이 작은 산불이 뿜어낸 메케한 연기와 재들이 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이것 때문에 아침마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산불이 만들어낸 공기의 오염을 상상해 본다면 헬라 철학자들과 성경에서 언급된 물과 공기의 오염, 물의 오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 우리들이 다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살고 있었고, 이 세상은 정말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런 위기 의식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산불 하나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순간 우리가 깨닫고 있습니다. 또 그 작은 산불이 만들어낸 이 메케한 연기와 공기에 떠다니는 재들 때문에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을 움직여 가는 것은 내 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 움직여져 가고 있고, 그런 것들이 나를 공격해 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소망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 성경은 이것을 ‘기회’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기회일까? 여러분이 에베소서 5:15-16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 본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은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좀더 정확하게 의역을 한다면 너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라.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다. 그러니 너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기회를 사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곧,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 붙잡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이 작은 산불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고, 또 이런 작은 공격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다 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하지만,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기회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지혜가 흔하지 않고, 이 땅에는 진리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하버드 대학에 지망하는 학생들이 학교 투어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투어 가이드가 학교 내 광장 스퀘어 한복판에 서 있는 동상 앞에 멈추더니, 그 동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이 동상은 하버드 대학의 창설자로 알려진 쟌 하버드 목사의 동상입니다. 이 아래 쓰신 것을 보십시오. ‘John Harvard Founder 창설자 1638년.’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과 이 아래 쓰여진 말은 half truth, half lie입니다. 이 설명에는 세 가지 면에서 거짓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John Harvard 목사의 동상은 오리지날 그 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조각하시던 조각가가 너무 시간에 쫓기고 있었는데 하바드 목사의 사진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그 분과 비슷한 사람을 모델로 해서 이 조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분의 모습은 아닙니다. 둘째로 이 분이 학교가 창립될 당시에 헌금으로 많이 기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 분이 창설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번째로 이 분이 이 아래 쓴 것을 보면 창설자 Founder John Harvard 1638년 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1638년을 그 분의 사망한 연도거나 출생한 연도, 아니면 학교를 세운 연도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출생, 사망, 학교 설립 연도가 아니라 1638년은 그가 재산의 절반을 바쳐서 학교의 library를 만드는 일에 기증을 했던 그 연도가 1638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명은 반쯤은 사실이지만 반쯤은 거짓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떠세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칼 한 것은 하바드 대학의 모토가 Veritas입니다. 이것은 라틴어로 ‘진실 혹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 소위 진리를 추구하는 그 세계적인 대학 하바드에 세워진 동상 하나에서도 우리는 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겨우 반절의 진실 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다운 인생을 사는 것을 배우고,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기회를 잡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겠어요. 바로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인생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인생의 지혜를 찾는 기회는 지금 이 산불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안달하면서 살았던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너무나 작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해 주는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제대로 붙잡는 것이 지혜입니다.
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지혜를 배우는 기회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흔히들 “그 사람은 기회를 잘 잡았어” 혹은 “아깝게 기회를 놓쳤어”라는 말들을 합니다. 좋은 기회는 인생의 방향을 바꿉니다. 기회를 잘 잡았기에 성공한 사람이 있고, 기회를 놓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이 인생의 기회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버립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간증한 것을 들어보면 평당 50만원을 달라는 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답니다. 하룻 동안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동산 업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하룻 사이에 누군가가 평당 55만원에 사버렸답니다. 너무 속이 상했는데, 더 속상한 것은 그 땅이 지금 평당 천 오백만원이 나간다고 합니다. 인생에는 참 여러분 기회가 오는데 그 기회는 그저 공짜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주고 사는 겁니다. 이 목사님은 50만원이 비싸면 어떻게 하지? 전혀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땅을 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위험부담’이라는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 운명을 바꾸는 기회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데 그 기회는 ‘위험 부담’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 지금 우리는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 지금 고통스러운 산불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지불하고도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전인적 치유 수양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전인적 치유 수양회는 우리 인생에서 큰 변화를 맛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공하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큰 지혜를 깨닫고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운명적인 기회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이 기회는 자주 오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기회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언제나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때가 바로 그 기회의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까지 평생 살아오면서 내 옛사람이 받았던 모든 상처들, 쓴 뿌리들, 나를 찢어질 듯이 아프게 하는 마음의 담석들, 돌멩이들을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새로운 생명,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지 못하고 실패한 옛사람을 아직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 하는 분들, 옛 사람의 성품, 삶의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 되기를 원하시고 그 기회를 브림 가족들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 기회를 붙잡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을 투자하고, 조금은 거추장스러움을 투자하고, 나의 열정을 지불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생의 이 기회를 붙잡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기회를 놓친 사람들
 마19장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한 부자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인생의 지혜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인지를 알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 성경이 말하는 계명, 곧 말씀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대답하는 이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다(막 10: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 그런데 이 청년은 이것이 그에게 온 인생 최대의 기회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습니다. 그는 그 인생 최대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 말씀처럼 그에게 찾아온 이 인생의 기회를 대가를 지불하면서라도 붙잡았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명의 한 부자 청년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요한처럼, 아니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그는 이 세상의 역사를 바꾸고, 그의 인생을 바꾸고, 하늘에서 예비된 인생의 모든 보화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기회를 그 스스로 박탈해 버린 것입니다.
 누가복음 23장 3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두명의 행악자가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행악자였다면 그들은 가장 추악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추악하고, 죄악된 인생을 살았던 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인생의 기회, 소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 기회를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조롱합니다. 예수를 조롱합니다. 네가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그에게 온 기회를 차버리고, 믿음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우리 죄 때문에 죽지만 이 분은 아무 죄도 없이 죽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그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기회를 붙잡은 강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잘 잡은 사람으로 칭찬받고 있지 않습니까?

기회를 붙잡은 사람들
 성경에 보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망이 없을 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잘 붙잡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삭개오도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사람입니다. 발이 빠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체면을 아랑곳 하지 않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의 집에 거하시고, 그의 삶은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 소경 바디매오는 어떻습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리고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 마다 그의 인생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한 혈루병 여인을 고쳤으며, 평생을 중풍병을 앓았던 사람이 고침을 받았으며, 문둥병자들이 나음을 입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의 눈도 떠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소망을 가졌습니다.
 그런데 눈을 볼 수 없는 이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쯤 계시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을 불러 세우고, 예수님을 그에게로 오시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멈춰 세우기 위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주목을 받기 위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오시도록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는 이것이 그에게 온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눈먼 그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눈먼 그가 예수님을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까이에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소리를 지릅니다. 자기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소리를 지릅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소리를 지릅니다.
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자신의 병을 고치고, 자기 인생에 다가온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해 그는 모든 체면을 버리고, 모든 핀잔을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바디매오, 그의 운명을 바뀌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만 제대로 만나면 우리 인생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삭개오처럼 인생의 목표가 바뀝니다. 바디매오처럼 그를 일생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불행하게 했던 불행의 뿌리, 쓴 뿌리가 뽑혀 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대가를 지불했던 사람들입니다.
 그 대가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절규하면서 기도한 것이고, 삭개오처럼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려고 그의 모든 체면을 버리고 뽕나무로 기어 올라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온 인생 최대의 기회, 곧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이 최소한의 대가는 수천 배의 하늘 보화가 되어 그들에게 돌아 왔습니다.

CONCLUSION: 기회를 붙잡으라
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 전인적 치유 수양회가 바로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탈바꿈 시킬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 이 기회를 잡기 위해 여러분은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 기회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시간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게으름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믿지 못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쓴 뿌리의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볼 수 없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 그런데 이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신 이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뒤쳐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보십시오. 대체로 사자들이 바람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이 사자들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게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를 합니다. 아주 약한 상대들은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강한 상대들, 예를들면 버팔로와 같이 좀 강한 상대들을 대할 때, 그들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강한 상대를 대할 때는 언제나 무리에서 누가 뒤쳐지는지를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 뒤쳐진 물소를 리더 사자가 공격합니다. 그러면 벌떼와 같이 다른 사자들이 그 물소를 공격해서 결국 쓰러트립니다.
 여러분! 악한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약한 상대들은 전혀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을 공격할 때는 그들도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희석시키고,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뒤쳐진 성도입니다.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하고, 확고한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늘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뒤쳐진 성도를 공격합니다.
 여러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붙잡는 일에 뒤쳐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번 전인적 치유 수양회에 올라가서 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 마지막 기회,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내 쓴 뿌리를 제거하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 마지막 기회를 붙잡기 위해 함께 절규하고, 뽕나무에 기어올라가는 몸부림 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은 변화됩니다. 삭개오처럼, 바디매오처럼, 베드로처럼, 철저하게 변화됩니다. 다시 태어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될 줄 믿습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4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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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세가지 성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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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있었던 두날개 양육훈련에 참가했었다. 이 훈련은 미국 각처에서 약 1,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는 목회자들만 모이는 줄 알았는데, 참석하신 목사님들이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여러 평신도 지도자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모이신 목사님들 모두가 너무나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정말 성령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다가도 식사 시간만 되면 피 터졌습니다. 1,200명이 밥을 먹기 위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배식하는 곳은 세 곳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짧은 줄이라고 해도 한 줄에 4백명 가까운 사람이 줄을 서야 되니까 박 터지는 겁니다. 어떤 줄이 더 빨리 먹을 수 있을까? 열심히 눈을 돌립니다. 저는 언제나 맨 뒷줄이었는데, 두번째 날 점심 시간에는 엄청나게 빨리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였습니다. 이 번 세미나에서 아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중에는 우리 교단에 속한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사모님과 교회 전도사님까지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줄이 너무 길고 오래 걸리니까 사모님이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강의 시간이 거의 끝나갈 쯤 되면 강의실을 빠져나가서 식당 앞에 서 있다가 강의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때쯤 딱 앞에 서는 겁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줄이 쫙 섭니다. 완전히 새로 군대 간 것 같습니다.
 저는 물론 맨 뒷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 사모님이 저를 찾아 오시더니 손을 끌고는 남편 목사님이 줄을 서고 계시는 맨 앞줄로 끌고 가는 겁니다. 야! 그 앞줄까지 가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사방에서 내 뒷 통수에 대고 총을 쏴대는 것 같습니다. 체면상 말은 못하고 눈총만 쏘는 것이 다 보입니다. 뒤통수에 눈도 없는데 뒷통수가 뜨끈 뜨끈 합니다. 그런데 밥은 빨리 먹었습니다.
 그 때 제가 생각했습니다. 야! 인생에 성공하는 길은 바로 이거다. 1) 남보다 빨리 줄을 서든지, 2) 아니면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담대함, 눈총을 받아도 기죽지 않는 이 담대함이 있든지, 3)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없이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일찍 밥을 먹고, 그래야 일찍 출세하고, 일찍 성공합니다. 남이 안하는 새로운 디자인을 가장 빨리 개발하든지, 아니면 남이 개발해 놓은 것을 슬쩍 베끼든지,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yangjongrae 작성

2009/09/03, 7:3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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